현진건, 운수 좋은 날_소설
<운수 좋은 날>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교과서에 등장해서 마음을 찌릿하게 하더니만 묘하게 한국인들의 감성에 주저앉아 버린 그런 작품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등장하는 '김첨지'는 소위 '츤데레'의 교과서로 많은 사람들의 유머 혹은 드립으로 사용되었다.
처음 소설을 읽고 울었고 그 후에 깊디 깊은 여운이 남았는데, 그 땐 소설의 슬픈 내용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치만 난 아직도 <운수 좋은 날>이 나에게 준 감정을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그것이 나를 이 소설에 매달리게 했고, 조금은 집착도 했다.
이런 개인적인 감상과는 별개로, 이 소설은 너무나 완벽하다. 난 한국의 단편소설 중 최고의 작품으로 언제나 이 작품을 꼽을 것이다.
이 짧은 글자수에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지, 10대 부터 20대 내내 다시 읽고 읽을수록 천재라는 생각을 했다.
한 문장 문장, 표현, 장면들도 모두.
(물론 작가의 다른 작품을 보면 그것이 의심스러울 때도 있지만)
내가 가진 이 소설의 감상은 조금 과장을 보태 거의 논문수준이 될 것 같아서, 간단하게 일부 감상을 집중적으로 기록해보았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김첨지의 행동이 현대 한국인의 감정과 모습과 참 닮아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관통했다고 표현했다가 다시 보니 닮았다는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 수정)
우리는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나 선진국 반열에 올랐고, 문화적으로도 나름 인정받으며 k-어쩌구 하는 세상이 됐다. 현대에는 별별 다양한 가치관이 공존하면서 이제는 생각하는 방식조차 변화를 요구하는 세상이다. 이렇게 천지가 개벽했음에도, 소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차치하더라도, 김첨지의 사랑 표현 방식은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있다.
난 그것이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가진 뿌리깊은 근성 어딘가이며, 그 근성은 늘 가장 소중한 것을 향해있기에 한국인들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성공해서, 시험에 붙어서, 한 번 고생하면, 내가 참으면 잘돼서 이거저거 해줘야지, 맛있는 거 사줘야지.'
이런 1차원적으로 보이는 소망안에 깃든 깊은 뿌리.
(김첨지에겐 설렁탕이고, 가족이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은 한국인을(사람을) 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김첨지는 그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하는 외로운 사람이었다.
이런 부분만 보면 우리네 50,60년대생 아버지들 같은 모습이 보인다.
그치만 그는 사실 소설에서 젊은 아빠다. 갓난쟁이를 둔.
약하고 여리면서도 마음을 단단히 부여잡으려고 애쓰는 김첨지의 모습은 힘들고 괴롭지만 굴러가야 하는 삶을 위해 버티고 버티는 요즘의 젊은 청년과 닮아있다는 생각도 한다. 어떻게 해도 희망이 손톱만한 삶속에서.
이제 인력거는 시대의 물건으로 사라졌지만, 김첨지의 인력거는 여전히 우리 주변을 뛰고 있다.
김첨지의 인력거는 너무나 많은 것을 태우고 있음에도, 그 무게가 너무나 무거운데도,
그는 여전히 그 무거운 인력거를 내려놓지 못한 채로 달리고 있다.
김첨지가 무거운 인력거를 내려놓고 집으로 갔다면 결말은 달라졌을까.
현대의 우리는 늘 운수 좋은 날을 기대하며 살아간다.